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이 된 적 있나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아담과 하와는 '남 탓'을 넘어 '주도권 싸움'을 시작합니다.
창세기 3장이 말하는 관계 파괴의 저주, 그리고 유일한 희망인 '가죽옷'의 의미를 발견해 볼까요?
연애를 갓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어쩜 이렇게 나랑 잘 맞아?"
"당신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야."
세상이 온통 핑크빛이고, 상대방의 단점마저 사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갈등이 깊어지면 어떻게 변하나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이렇진 않았을 거야."
"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은 왜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해?"
'내 인생의 축복'이었던 그 사람이, '내 인생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순간.
가장 친밀했던 관계가 가장 고통스러운 전쟁터가 되어버린 경험.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아닐까요?
이 끔찍한 '관계의 변질'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그 여자가 줘서...", "뱀이 꾀어서..."라며 '남 탓'을 하던 아담과 하와.
그들의 '남 탓'은 단순히 책임을 회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었고, 그 순간 그들의 '서로 간의 관계' 역시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01. 관계, 전쟁이 되다.

'남 탓'으로 가득한 에덴동산에 무거운 정적이 흐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수치심만이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심판(죄의 결과)을 선고하십니다.
먼저 뱀(사탄)에게는 가장 미스터리하고도 중요한 예언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창 3:15)`
이것은 훗날 이 싸움을 끝낼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절망 속에 숨겨진 '최초의 복음(원시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와에게 돌아서십니다.
그녀에게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관계의 고통'이 선고됩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 3:16)`
이 구절은 로맨틱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저주입니다.
'돕는 배필'로서 평등했던 파트너십이 깨졌다는 선언입니다.
'원하고(Desire)'라는 단어는, '지배하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창 4:7의 '죄의 소원'과 같은 단어).
'다스릴 것(Rule)'이라는 단어 역시 사랑의 돌봄이 아닌 '힘의 지배'를 의미합니다.
즉, "너희는 이제 서로 사랑하며 연합하는 대신,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사랑의 관계가 '주도권 싸움(Power Struggle)'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아담에게도 저주가 선포됩니다.
그가 '남 탓'을 하며 책임을 전가했던 '땅(아다마)'이 저주를 받습니다.
기쁨의 '사명'이었던 일은, 이제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워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땀)'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깨졌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까지.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스스로 엮은 '무화과나무 잎'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얇고, 금방 마르고, 찢어지기 쉬운 그들의 '노력'은 이 총체적인 파괴 앞에서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다가오십니다.
그들을 정죄하거나 쫓아내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 3:21)`
이것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 속 가장 충격적인 반전입니다.
02. '공의'로 심판하시고, '희생'으로 입히시는 하나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관계의 질서'를 세우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Vertical)'는 모든 '수평적 관계(Horizontal)'의 뿌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살겠다"고 선언하며 그 뿌리를 스스로 잘라냈을 때(죄), 가지에 해당하는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관계'가 마르고 병드는 것(저주)은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질서의 깨어짐을 분명히 선고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남 탓'을 하며 관계를 파괴한 그들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초라한 '무화과 잎'(인간의 노력)을 보셨습니다. 그것으로는 그들의 수치와 죄를 가릴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만들려면 반드시 '동물'이 죽어야 합니다.
죄는 아담과 하와가 지었는데, 죄 없는 동물이 그들 대신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희생 제사'였습니다.
이 '가죽옷'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진리, 즉 '희생을 통한 덮으심(속죄)'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죄와 수치는 우리의 노력(무화과 잎)으로 가릴 수 없으며, 오직 '죄 없는 누군가의 피 흘리는 희생'(가죽옷)을 통해서만 가려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가죽옷'의 실체는 훗날 유월절 어린 양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관계가 깨어진 바로 그 순간, 이미 '관계 회복'을 위한 구원의 계획(가죽옷)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03. '뿌리'가 뽑히자 '관계'도 무너진 인간
창세기 3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이 어떻게 변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 "내 뼈 중의 뼈" → "너를 지배하겠다"
아담이 하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황홀경에 빠져 노래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이것은 "우리는 하나다"라는 완벽한 '연합'과 '동등함'의 선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자마자, 이 관계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저 여자 때문에..." (남 탓)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지배와 갈등)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 갈등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채워야 할 '존재의 안정감', '사랑받을 가치',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수평적 관계', 즉 배우자나 연인, 자녀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나의 이 근본적인 결핍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상대를 '지배'하려 하고('내 뜻대로 해줘'), 상대에게 '의존'하며('나를 채워줘'), 결국 서로를 원망하게 됩니다. '사랑'이 '주도권 싸움'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 "무화과 잎" vs "가죽옷"
죄를 지은 인간의 첫 반응은 '수치를 가리려는 노력'(무화과 잎)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괜찮은 척', '잘난 척', '성공한 척'하며 스스로의 결핍과 죄를 가리려는 모든 '자기 노력'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자기계발, 명상, 도덕적 노력(무화과 잎)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하려 합니다.
하지만 무화과 잎은 금방 마르고 찢어집니다. 우리의 노력은 근본적인 '수치심'과 '죄의 문제', '깨어진 관계'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수치를 완전히 덮어줄 '하나님의 가죽옷(은혜)'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입니다.
04. 결론
창세기 3장의 핵심은 단순히 '저주'와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총체적 파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 시작된 '관계 회복의 첫걸음'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깨지자, 모든 수평적 관계(인간관계, 자연과의 관계)도 무너졌습니다.
'사랑의 연합'은 '지배와 갈등'으로 변질되었고, '기쁨의 사명'은 '고통의 노동'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모든 관계 갈등의 뿌리입니다.
둘째, 우리의 노력(무화과 잎)은 이 파괴된 관계와 수치를 가릴 수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희생'(가죽옷)을 통해 이 깨어진 관계를 덮고 회복의 길을 여셨습니다.
'남 탓'을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대신 죽음'이라는 은혜로 응답하셨습니다.
혹시 지금,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과 '주도권 싸움'을 하느라 지쳐있진 않으신가요?
"다 네 탓이야"라고 원망하며, 초라한 '무화과 잎'으로 나의 수치를 가리고 있진 않으신가요?
기억하십시오. 그 관계의 회복은 '누가 옳은가'를 따지는 '남 탓'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깨어짐을 인정하고, 나를 덮으시는 하나님의 '가죽옷(은혜)'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우리는 다음 이야기에서 '일'이 왜 고통이 되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왜 그들을 에덴에서 '추방'하셨는지에 대해 더 다뤄보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왜 '일'은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창세기 3장, 노동의 저주와 추방의 의미)"에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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