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인은 왜 성을 쌓았을까요?
죄로 가득한 세상 속 불안(남 탓) 때문입니다.
반면 셋의 족보는 '죽었더라'만 반복됩니다.
이 절망 속에서 유일한 희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비밀을 발견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우리는 왜 그토록 '안전'에 집착할까요?
더 높은 연봉, 더 넓은 아파트, 더 안정적인 직장, 더 많은 저축...
우리는 끊임없이 '성(City)'을 쌓습니다. 마치 내일이라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처럼 불안해합니다.
왜일까요?
어쩌면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이 세상은 "서로 물고 뜯는 곳"이라는 근원적인 공포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외쳤던 카인의 세상.
'남 탓'과 '관계 파괴'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조차 온전히 믿지 못하고 '나만의 성'을 쌓는 데 몰두합니다.
오늘 창세기 4장과 5장은, 이 '성'을 쌓았던 카인의 길과, 그저 묵묵히 '길'을 걸었던 셋의 길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01. 불안이 만든 '카인의 문명'

아우를 죽인 카인. 그는 하나님께 "땅에서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습니다.
카인은 즉각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 4:14)
'남 탓'으로 아우를 죽인 자가, 이제 '남'이 자신을 죽일까 봐 두려워하는 완벽한 아이러니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카인에게조차 '자비'를 베푸셔서, 그를 보호할 '표'를 주십니다. "너를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제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카인은 하나님의 '말씀(표)'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라는 무형의 약속 대신, '자신의 힘'이라는 유형의 벽을 선택합니다.
"카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성을 쌓고..." (창 4:16-17)
왜 하나님을 떠난 카인의 길 끝에는 '성'이 있을까요?'안전함'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작한 '서로 물고 뜯는' 죄의 본성 속에서, 이제 그 자신도 안전할 수 없음을 직감한 것입니다. '성'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안전해지려는 인류 최초의 인본주의적 시도였습니다.
카인의 후손들은 이 '성' 안에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웁니다.
• 유발: 수금과 퉁소를 잡은 자 (문화, 예술의 시작)
• 두발가인: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든 자 (기술, 군사력의 시작)
겉보기엔 대단한 '성과'입니다.
하지만 그 문명의 정점에서, '죄의 심화'가 폭발합니다.
카인의 6대손 '라멕'입니다. 그는 두 아내를 거느리며(최초의 일부다처제), 자신의 폭력을 '노래'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카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창 4:23-24)
이것은 '자랑'입니다.
"나는 카인보다 77배나 더 잔인하게 복수할 수 있는 대단한 존재다!" 하나님 없는 문명, '성' 안에 갇힌 인간의 '자기 의'가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 라멕이 증명합니다.
02. '남은 자'를 통해 '관계'를 이어가시는 하나님
카인의 문명이 그렇게 폭력으로 치닫고 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그분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아담이...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카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 4:25)
여기서 우리는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셋'은 '임명된 자', '대신 놓인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대신하여 '관계의 계보'를 이어갈 자를 '친히 임명하신(예정하신)' 것입니다.
카인의 후손들이 '성'을 쌓고 '자신의 이름'(라멕)을 노래할 때, 셋의 후손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셋도 아들을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그들은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회복했습니다.
그들은 '관계'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관계 회복'의 시작입니다.
03. "죽었더라" vs "동행하더니"
창세기 5장은 '셋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이 족보는 이상하리만치 슬픕니다.
"아무개는 몇 세에 누구를 R고 몇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몇 세를 살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이 '죽었더라'는 후렴구는 아담의 죄로 인한 '죽음'의 저주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절망적인지를 고발합니다.
이것이 '셋의 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함께하는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멍청해 보일 수 있는' 길입니다.
'카인의 길'은 성을 쌓고, 악기를 만들고, 철기를 다루며 화려한 '성과'를 냅니다.
하지만 '셋의 길'은 그저 "낳고... 살고... 죽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절망적인 '죽음의 행진' 한가운데, 성경은 단 한 사람, 놀라운 예외를 기록합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1-24)
에녹은 '죽었더라'는 후렴구를 깬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가 무엇을 했습니까? '성'을 쌓았습니까?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단 하나,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 카인의 길 (자기 의): 불안(죄의 본성) 때문에 '성'을 쌓습니다. (자기보호) 화려한 '업적'(문명)을 이루지만, 그 끝은 '폭력'(라멕)과 '하나님 없는 공허함'입니다.
• 셋의 길 (하나님 의존): '죽음'의 현실을 직시합니다. 세상의 눈에 '멍청해' 보일지라도, 유일한 희망인 '하나님과의 관계'(예배, 동행)를 붙잡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안'을 누리는 길입니다.
04. 결론
오늘 창세기 4-5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첫째, 카인의 길: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불안'하기에 '성'을 쌓습니다.
'남 탓'과 '관계 파괴'의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려 합니다.
이 길은 겉보기엔 화려하지만(문명, 업적), 그 끝은 더 큰 폭력(라멕)과 영적 공허입니다.
둘째, 셋의 길: '죽음'의 현실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임명된 씨)'을 붙잡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 길은 세상의 눈에 '멍청해' 보일 수 있습니다.
셋째, 유일한 희망, 에녹: 이 '죽음'의 길 속에서 유일한 희망은 '업적'이 아니라 '동행'입니다.
하나님은 카인에게조차 '표'를 주셨지만, 카인은 그것을 믿지 못하고 '성'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은 셋의 계보에 '죽음'의 현실을 허락하셨지만, '동행'한 에녹을 통해 죽음을이기는 '진짜 안전'과 '진짜 평안'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쌓고 있습니까?
'남 탓'의 세상이 두려워 더 높은 '카인의 성'을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죽었더라'는 인생의 한계를 인정하고, 세상이 멍청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에녹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미 '셋'을 통해 우리와 '관계할 자'들을 예정하고 부르고 계십니다.
진정한 평안은 '성' 안에 있지 않고, '동행' 안에 있습니다.
카인의 길을 택한 인류의 죄악은 결국 하늘에 닿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더라'는 셋의 계보 속에서, '동행'했던 에녹의 증손자인 한 남자, '노아'를 발견하십니다.
다음 이야기, "죄악이 가득함을 보시고... :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 (노아와 홍수)"에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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