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은 '관심'이자 '관계'입니다. 16장에서 '자식'에게만 관심이 쏠렸던 아브람.
하나님은 13년을 기다리셨다가, 99세에 '새 이름'을 주시며 그 '관심'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주는 의미는 절대적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했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냥 '라벨'을 붙인 게 아닙니다.
그 대상을 '잘 살피고', '관심을 갖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며 '관계를 맺는' 행위였습니다.
'관심'은 '사랑'의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잘 보이고' 싶어 합니다.
16장, 아브람의 실패는 이 '관심'의 실패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별)'이 아닌, '사래의 고통'과 '자식 없음'이라는 '나의 결핍'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관심'이 '자식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될 때, '인간적인 꾀(하갈)'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13년'을 침묵하십니다.
01. 13년간의 '기다림'

아브람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는 '인간적인 꾀'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의 '관심'은 '보이는 아들' 이스마엘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관심 있게' 지켜보셨습니다.
아브람 스스로가 '이스마엘'이 '약속의 아들'이 아님을 깨닫기를, 그의 '잘못된 관심'이 끝나기를, 다시 '하나님만' 사랑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그 때'(Kairos)를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완전한 끝'.
'이스마엘'이 답이 아님이 명백해진 '그 때'.
하나님이 13년 만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의 '잘못된 관심'을 돌이키는 첫마디를 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El Shaddai)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아브람아, 너는 '자식'에 관심이 있었지만, 나는 '전능한(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하나님이다.
너의 '힘'이 아닌 '나의 전능함'에 '관심을 집중'하라."
02. '새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은 이 '관계의 재설정'을 위해 '약속의 증표'를 주십니다. 바로 '새 이름'입니다.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5)
이것은 16장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이토록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하나님의 '사랑 고백'입니다.
아브람 (존귀한 아비): '내 집안'의 아버지 (아브람의 '작은 관심')
아브라함 (모든 민족의 아버지): '하나님의 큰 그림' (하나님의 '큰 관심')
하나님은 아브람의 '관심'을 '자식(이스마엘)'에서 '모든 민족(이삭)'으로 확장시키십니다.
'사래'(나의 공주)를 '사라'(모든 민족의 어머니)로 바꾸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은 '관계'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은 '새 이름'을 주시며, "너는 '나의 약속'으로 정의되는 존재다"라고 그 '관계'를 '육체'에 새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너희는... 할례를 행하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1)
'할례'는 '인간의 힘'(육체)으로 16장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고, '육체'를 끊어내는 이 '표징'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관심'을 고정하라는 '순종'의 요구였습니다.
03. "이스마엘이나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큰 관심'을 바로 이해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현실'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웃으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100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90세인데..." (17:17)
그리고 그는 '자신의 Plan B'를 하나님께 내밉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8)
"하나님, '이삭'이라는 '보이지 않는 약속' 말고요, 그냥 지금 '보이는 내 아들' 이스마엘이나 잘되게 해주세요." 16장의 '잘못된 관심'이 13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반드시'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17:19)
믿음의 선포였던 고백이, 눈 앞에 비슷한 결과지만 완벽하지 않은 결과로 인해 아브람은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완전한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결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04. 결론
창세기 17장의 핵심은 '관심의 전환'입니다.
첫째, 16장의 실패는 '하나님의 약속'보다 '나의 결핍(자식)'에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13년의 침묵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관심'이 끝나고 다시 '하나님께 집중'하기를 기다리시는 '관심'의 시간이었습니다.
셋째, '새 이름'은 "내가 너를 이토록 '관심' 있게 보고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할례'는 "너도 나에게 '관심'을 집중하라"는 '순종'의 요구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적인 Plan B'(이스마엘)가 아니라, 그분의 '불가능해 보이는 Plan A'(이삭)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나의 결핍'과 '보이는 현실'에만 쏠려 있습니까?
아니면 99세의 절망 속에서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새 이름'과 '할례'로 관계를 재설정한 아브라함.
그는 이제 '지나가는 손님'들조차 예사로 보지 않는 '영적 민감성'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편한 협상'을 하나님과 벌이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 하나이까" :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위험한 중보기도' (창세기 18장)"에서 만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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