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의 시작, 재의 수요일을 맞아 마태복음 3장 13-17절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이 죄인의 줄에 서신 이유와 '유도케사'의 은혜를 통해, 오늘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증명의 삶'에 대해 나눕니다.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우리는 보통 '더 좋은 것', '남보다 앞선 것'을 얻기 위해 기꺼이 줄을 섭니다.
그런데 여기, 조금 이상한 줄이 있습니다.
축축한 강바닥 흙탕물 속에, 자기 죄를 고백하러 온 사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습니다.
아무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차라리 숨기고 싶은 '죄인들의 줄'입니다.
그런데 그 줄 맨 끝에, 낯익은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거룩하신 분이 왜 굳이 이 비루한 줄에 섞여 계신 걸까요?
01. 성경본문
개혁개정
(마태복음 3장)
세례를 받으시다(막 1:9-11; 눅 3:21-22)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02. 흙탕물 속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사랑

오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기꺼이 우리와 같아지시는 분'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죄가 없으시니까요.
하지만 주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며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구름 위 보좌에서 우리를 심판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고통의 줄, 후회의 줄에 직접 찾아와 곁에 서주시는 분입니다.
사순절의 시작은, 우리와 똑같아지기로 결심하신 그분의 지독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03. 증명해야 안심하는 우리, 이미 사랑받는 자녀

반면 성경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만 안심하는 존재'로 비칩니다.
"내가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겠지."
"남들보다 이만큼은 앞서야 내 가치가 증명되겠지."
우리는 늘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주님은 화려한 주인공의 자리가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 계셨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 곁으로 낮게 내려갈 때, 비로소 진짜 하늘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04. '유도케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이유

이번 본문을 원어로 깊이 들여다보면, 가슴 벅찬 단어 하나를 만납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 "내 기뻐하는 자라"는 선언입니다.
유도케사 (εὐδόκησα): 어떤 결과를 보고 만족하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전적으로 선택하고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음성이 들린 시점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기적을 베풀기도 전이고, 대단한 설교를 하기 전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존재'에 달려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 낮아지기로 결정할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보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십니다.
05. 결론

사순절 첫날입니다.
남들보다 앞서려 애쓰던 마음의 왕관을 잠시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실천할 소박한 결단 두 가지를 제안합니다.
1. 먼저 져주기:
"내가 맞다"고 증명하고 싶은 순간에 한 번만 참아보세요.
주님이 죄인의 줄에 서셨던 것처럼, 나도 낮은 자리에 서보는 것입니다.
2. 나의 정체성 선포하기: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속삭이세요.
"나는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기쁨이다."
재의 수요일, 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고 주님의 줄 뒤에 서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화려한 환호가 아닌, 고독한 광야로 이어집니다.
무엇이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는 무엇으로 이겨내야 할까요?
다음 시간, [사순절 묵상 2일차] 묵상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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