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 29일차, 한 알의 밀알을 묵상합니다.
희생 없는 영광만 구하던 구경꾼의 신앙을 회개하고(내면), 나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썩어지신 주님과 연합하여, 일상에서 이웃을 살리는 썩어짐의 자리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외면) 십자가 생명력을 나눕니다.
우리는 흔히 고난이나 헌신, 내 자아를 죽이는 뼈아픈 희생의 과정은 쏙 빼놓은 채 그저 화려한 축복과 부활의 열매만을 기대합니다. 이른바 '십자가 없는 영광'을 꿈꾸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제자들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인 '헬라인'들까지 예수님을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20절).
제자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저 이방인들까지 머리를 조아리니, 이제 우리 선생님이 로마를 뒤엎고 세계적인 왕좌에 앉으실 날이 코앞이다!"
잔뜩 흥분하여 승리의 샴페인을 터뜨리려던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가장 서늘하고도 벅찬 십자가의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01. 성경본문
요한복음 12장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02. 왕좌가 아닌 사형 틀을 선택하신 우주적 선언

오늘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가장 높은 곳의 영광을 버리고, 온 우주를 품기 위해 기꺼이 흙바닥에 떨어져 썩어지신 분'으로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내내 "내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신약학자 헤르만 리덜보스의 통찰처럼, 이방인(헬라인)이 찾아온 바로 이 순간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유대인을 넘어 온 우주를 구원할 결정적인 십자가의 시간이 당도한 것입니다.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동원하여 역설을 선포하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24절)." 창조주이신 주님은 흙바닥에 버려져 밟히고, 자신의 살갗(껍데기)이 처절하게 찢겨지고 썩어지는 그 지독한 죽음의 방식을 기꺼이 당신의 찬란한 영광으로 취하셨습니다.
03. 껍데기를 깨기 싫어, 관중석에 머물려는 구경꾼의 신앙

반면 성경이 짚어내는 우리의 뼈아픈 연약함은 '단단한 자존심의 껍데기를 깨기 싫어,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않고 관중석에서 박수만 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흙의 수분과 압력을 받아 자신의 단단한 껍데기가 부서지고 짓무르는 고통의 과정(썩어짐)을 겪어야만 그 안에서 파릇한 생명이 터져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내 자존심이 깎이고 권리가 손해 보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6절에서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아콜루데이토)"고 명하십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지적처럼, 예수님을 섬긴다는 것은 안전한 관중석에 앉아 은혜로운 설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 기득권을 내려놓고 예수님이 떨어지신 그 흙바닥(십자가)으로 함께 걸어 들어가 기꺼이 같이 썩어지는 치열한 제자도입니다.
04. '푸쉬케'의 장례식, 그리고 하늘 아버지의 인정 '티메세이'

예수님은 생명의 진짜 원리를 명확히 하십니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25절)."
개혁주의신학에서는 내가 잃어버려야 할 생명을 타락하고 이기적인 나의 자아(푸쉬케)로, 내가 얻게 될 생명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조에)으로 봅니다.
내 알량한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썩어지는 것은 결코 비참한 패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흙바닥에 떨어져 썩어질 때 세상은 우리를 바보라고 비웃겠지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티메세이, τιμήσει)."
이 단어는 하나님이 온 우주에서 가장 값비싼 존귀함을 매겨주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칭찬을 버리고 하늘 아버지의 인정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05. 결론

여러분.
오늘 당신은 죽기를 거부하며 관중석에 앉아있는 단단한 밀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흙바닥에 썩어짐으로 누군가를 살려내는 밀알입니까?
사순절 29일차, 썩어짐으로 생명을 낳으신 십자가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수직적(하나님 사랑)과 수평적(이웃 사랑) 실천을 결단해 보길 원합니다.
1. '푸쉬케(이기적 자아)'의 장례식 치르기:
오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아지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십자가를 바라보며 조용히 내 자아의 장례식을 치르십시오. "주님, 나를 죽이는 희생 없이 열매만 따 먹으려 했던 관중석의 신앙을 회개합니다. 온 우주를 살리기 위해 '아멘 아멘'으로 썩어짐을 택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오늘 내 굳은 껍데기(자아)를 완전히 깨뜨려 주옵소서."
2. 은혜가 흘러가는 '거룩한 썩어짐의 자리' 찾기:
십자가에서 나를 살리신 밀알의 은혜를 깊이 누렸다면, 그 생명은 억지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이웃을 살리는 썩어짐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합니다. 오늘 조용히 주님께 여쭈어 보십시오. "주님, 하늘 아버지의 그 존귀한 인정(티메세이)을 받은 자로서, 오늘 나의 자존심을 꺾고 기꺼이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주님이 마음에 강하게 밀어내시는 그 한 사람(가장 가까운 배우자, 자녀, 혹은 갈등 중인 팀원) 앞에서, 오늘 내가 먼저 입을 다물고 양보하는 '밀알의 썩어짐'을 기쁘게 흘려보내십시오.
내가 살아서 펄펄 뛰면 공동체가 죽고, 내가 십자가 앞에 썩어지면 나와 내 이웃이 살아납니다. 밀알의 썩어짐은 끝이 아니라, 가장 찬란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P.S. 킹덤빌더즈: 썩어짐이 생명이 되는 위대한 밤
끝없는 경쟁 속에서 내 자아를 부풀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일에 지쳐버렸다면, 기꺼이 흙바닥으로 추락하여 당신을 살려내신 생명의 왕 품으로 오십시오. 유튜브 채널 '킹덤빌더즈' 매일 밤 11시 30분, 내 알량한 자아(푸쉬케)가 죽고 아버지의 영원한 인정(티메세이)을 받는 은혜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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