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화할 때 유독 어려운 전문 용어나 영적인 단어만 골라 쓰며 은근히 자기를 과시하는 사람을 본 적 있으신가요?
듣는 사람은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소외감을 느끼는데, 말하는 사람 혼자 도취되어 있다면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도 타인의 유익은 안중에도 없이, 내 영적인 우월함을 뽐내기 위해 허공에 대고 나팔을 불어대는 우리의 찌질한 교만을 정직하게 직면해 봅니다.
목차
교회 안에서 구역 모임이나 소그룹을 할 때, 초신자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우리만의 '영적 은어'나 화려한 신학적 지식을 줄줄 늘어놓으며 은근히 우쭐했던 적은 없으신가요?
나는 이렇게 성경을 잘 알고 기도를 깊이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곁에 있는 형제가 내 말에 상처를 받는지 위축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화려한 신앙의 언어는 듣기 싫은 소음에 불과합니다.
이웃의 영혼을 살리는 데는 철저히 무능력하면서, 오직 남들에게 '신령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이기적인 관종. 이것이 바로 거룩함으로 포장된 우리의 찌질한 실존입니다.
01. 성경본문
고린도전서 14장
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4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6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7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9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10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1)외국인이 되리니
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02. 이교도적 황홀경을 교회로 끌고 온 영적 교만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14:9)
1세기 고린도 도시는 아폴로나 디오니소스 같은 이교도 신전들이 즐비한 곳이었습니다.
그 신전들에서는 이성을 잃고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소리(황홀경)를 내뱉는 것을 신과 접신한 '최고의 영적 상태'로 여겼습니다.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이 잘못된 관습을 교회 안으로 그대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주신 '방언'을 이교도들의 황홀경처럼 여기며, 통역도 없이 예배 시간에 경쟁적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형제들이 이해하든 말든, "내가 너희보다 훨씬 더 신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무서운 권력 싸움이었습니다. C.S. 루이스가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며, 다른 사람을 내려다볼 때만 쾌감을 느낀다"고 경고했듯, 이들은 형제를 섬기는 예배마저 내 영적 우월감을 자랑하는 무대로 타락시켜 버렸습니다.
03. 영웅이 아닌 교회를 세우길 원하시는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전서 14:12)
하나님은 무질서와 혼란의 신이 아니라 질서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목적은 소수의 영적 엘리트를 만들어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단어는 '덕을 세우다(오이코도메오, οἰκοδομέω)'입니다. 이는 본래 건축물을 튼튼하게 지어 올린다는 뜻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은 반드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수고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나 혼자 신비로운 체험에 빠져 허공에 소리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에게 주신 은혜가 누군가 알아들을 수 있는 따뜻한 위로의 '예언(말씀)'이 되어, 곁에 있는 지체를 단단한 성전으로 세워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04. 바벨탑의 소음을 오순절 성령으로 회복하신 은혜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고린도전서 14:7)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자기 이름만 높이려는 이 소음의 역사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인간이 교만으로 하나 되어 탑을 쌓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흩어 소통할 수 없는 '소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소통의 단절은 신약의 사도행전, 곧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통찰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찌질함을 온몸으로 체휼(쉼파데오, συμπαθέω)하시며 십자가에서 찢기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회복된 우리의 심령에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는 각기 다른 언어를 쓰던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서로 알아듣고 소통하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웃과의 소통이 회복된 눈부신 표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우리의 의지와 교만한 마음으로 이 위대한 소통을 다시 파괴했습니다. 성령이 주신 회복의 선물을 가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자기 자랑의 도구로 변질시켜 교회 안을 다시 '바벨탑의 혼돈'으로 어지럽힌 것입니다.
진짜 성령의 은혜에 붙들린 사람은 허공에 나팔을 불며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친히 내 삶을 번역해 주신 예수님처럼, 이웃의 상처를 알아듣고 소통하며 관계를 회복하는 십자가의 통로로 살아갑니다.
05. 결론

신앙의 성숙함은 내가 얼마나 화려한 은사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 은사가 이웃과 얼마나 깊이 소통하며 교회를 단단하게 세워주느냐(오이코도메오)에 달려 있습니다.
교만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던 바벨탑의 소음을 멈추고, 성령 안에서 참된 소통을 회복하신 십자가의 은혜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함께 조금 더 예수님 닮아가기 위해 일상에서 실천해 봅시다.
- 하나님을 향한 고백: 오늘 하루, 영적인 지식이나 체험을 앞세워 남을 가르치려 들며 불통의 벽을 쌓았던 교만을 내어놓읍시다. "주님, 성령께서 주신 소통의 은혜를 자기 자랑으로 어지럽혔던 바벨탑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하늘의 언어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번역해 주신 그 온유함이 내 입술을 다스리게 하옵소서."
- 이웃을 향한 실천: 오늘 만나는 사람(가족, 직장 동료)에게 내 조언이나 지식을 뽐내는 말을 하루만 완전히 멈춰보십시오. 대신 상대방의 눈을 맞추며, 그가 가장 알아듣기 쉬운 '공감의 언어'로 진심 어린 질문 하나를 건네보십시오. 나를 증명하려는 소음을 끄고 타인의 마음과 소통하는 그 작은 한마디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가장 위대한 예언이자 예배입니다.
"나는 교회에서 대단한 역할도 못 하고, 화려한 기도도 할 줄 모르는 초라한 사람 같아." 혹시 남들의 화려한 신앙생활을 보며 기가 죽어 계신가요? 얇고 가느다란 검은 선의 팔다리로 무거운 왕관을 묵묵히 버텨내고 있는 킹덤빌더 친구를 보십시오.
주님은 허공을 치는 화려한 나팔 소리보다, 그 얇은 팔로 곁에 있는 형제의 손을 투박하게 잡아주며 소통하는 당신의 조용한 사랑을 훨씬 더 기뻐하십니다.
유튜브 채널 '킹덤빌더즈' 오늘 밤 11시 30분, 나를 뽐내려는 소음을 끄고 십자가의 고요하고 따뜻한 소통 안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성경말씀묵상 > 고린도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린도전서 14장 묵상] 내 목소리를 내느라 질서를 깨뜨리진 않나요? (0) | 2026.06.18 |
|---|---|
| [고린도전서 14장 묵상] 불신자가 보기에 우리의 예배는 미친 것 같지 않나요? (0) | 2026.06.17 |
| [고린도전서 13장 묵상] 내가 한 희생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하진 않나요? (0) | 2026.06.15 |
| [고린도전서 12장 묵상] 연약한 내가 과연 교회에 쓸모가 있을까요? (0) | 2026.06.13 |
| [고린도전서 12장 묵상] 내게 주신 은사는 누구를 향해 흐르고 있나요? (0) | 2026.06.12 |

